15일 KBS1 <역사저널 그날(279회)>에서는 제3공화국을 뒤흔들다-정인숙 피살사건” 방송에서는 정치인과 재벌들의 상대한 요정 접대부 정인숙 권총 피살사건에서 시작해 그동안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공개했다. 그중 박정희 정권시절 주로 일본 광광객과 한국주준 미군을 상대로 매춘사업을 나라에서 관리하고 장려했던 충격적인 이야기들을 공개했다.
정인숙은 제3공화국 당시 화제 인물로, 서울 시내 고급 요정에서 활동하던 접대부였다.모델, 배우 지망생이었으나 고급 요정의 종업원이 되어 제3공화국 당시의 정계 거물들을 상대했던 그녀는 국무총리 정일권의 아이를 임신했으나 이것이 불문에 붙여졌다.아들의 아버지는 박정희 대통령이라느니, 정 전 총리라느니, 이후락 전 중정부장이라느니 하는 소문들도 무성 하기도 했다.
1980년대에 국회의원을 지낸 모 인사는 "정인숙을 편력한 이들은 박정희, 박종규, 정일권 씨 등이었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그밖에 이후락 등과도 관계를 갖기도 했다.
그녀가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 입을 열지 않는 가운데 소문이 확산되었고 당시 정인숙이 낳은 아들의 아버지는 정일권 혹은 박정희라는 소문이 파다했다.정인숙은 정일권이 자신을 서운하게 할 때마다 자신이 정일권 총리의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떠벌리고 다녀 정일권을 난처하게 한다. 이 사실이 야당 인사들과 박정희 대통령의 귀에 들어가게 될까봐 정일권은 불안해했고, 서둘러 불법 여권 두 개를 만들어 정인숙을 해외로 내보내고 생활비를 풍족하게 줄테니 아이를 키우며 해외에서 조용하게 살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주변의 발설에 의해 정일권이 아이의 아버지라는 설이 유포되었고, 이는 신민당 의원들이 국회와 언론에 언급하면서 알려지게 됐다. 계속된 질문 공세에 가족들은 그 아이가 정인숙의 아이가 아니고 정인숙의 배다른 동생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정인숙은 1970년 3월 17일 밤 11시경, 서울 마포구 합정동절두산 근처 도로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를 가장한 사고에 의해 살해되었다. 정인숙은 현장에서 총상으로 사망하였고 그의 차를 운전하던 넷째 오빠 정종욱은 넓적다리를 관통당하였으나 생존해 있었다. 정종욱은 택시 기사에게 도움을 청하여 구조되었다
사후 현장에 있던 친정 오빠 정종욱이 용의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 사고 당시 발표에 의하면 '정종욱은 난잡한 생활을 하는 데다 자신을 멸시하는 동생을 죽일 결심을 하고 소지하던 권총으로 살해 했다', '정인숙을 쏜 후 혐의점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허벅지를 쐈다'고 발표했으나 정종욱은 진술에서 건너편 차선에 의문의 차량을 봤다고 진술했다.
이후 범인은 친오빠로 알려졌다. 하지만 현재 친오빠는 19년의 수감 생활 끝 거짓자백을 했다고 밝혔다. 당시 정인숙의 집에서는 수첩이 발견됐다. 수첩 안에서는 그녀가 관계해 온 것으로 믿어지는 유력인사들의 명단이 적혀 있었다. 당시 대통령 박정희를 비롯한 5대 재벌그룹 회장, 거물급 국회의원 등 26명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이에 정인숙 피살 사건 뒤에 권력층이 관계돼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한편, 정인숙은 당시 국무총리 정일권의 내연녀로 정인숙 살해 사건의 피해자였다. 살해 당시 그의 친정 오빠이자 운전수인 정종욱을 유력용의자로 지목했으나, 유력 용의자는 다른 인물로 밝혀졌으나 배후는 미궁이다. 본명은 정금지이고, 다른 별명은 정혜미이며, 경상북도 대구 출신이다.
정인숙은 1945년 2월 13일 대구 남산동에서 후일 해방 뒤 대구직할시 부시장을 지낸 정도환과 부인 전덕조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정도환은 자수성가형 인물로, 행정공무원으로 자유당 정권에서 대구부시장까지 올라갔다.
대학을 중퇴한 후 일정한 직업이 없던 그는 서울 충무로 영화가를 전전하며 또한 문학공부를 하고자 했던 정인숙은 1963년 시나리오 작가인 장사공을 만나 1년 정도 교제를 했다.이 때 정인숙과 장사공은 동거를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정인숙은 장사공의 소개로 S영화사와 접촉이 되어 2,3편의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했다.그러나 신촌과 수유리 등을 전전하며 하숙생활을 하던 정인숙과 장사공의 동거생활은 오래가지 못했고
장사공은 정인숙을 구타했고, 정인숙은 대구의 집으로 도망오기도 했다.경제적으로도 무능력했던 장사공은 바람을 피우고 있었고, 결혼까지 생각했던 두 사람의 사이는 1년 만에 파탄으로 끝났다.
이때 임신 수 개월이었던 그녀는 서울특별시 내의 한 병원에 가서 아이를 낙태했다.
한편 정인숙은 장사공과의 동거 중 관계가 악화되면서 비밀요정을 경영하던 마담 김씨를 만나 패션모델로 몇 차례 나서기도 했다. 그러다가 정인숙은 김마담이 경영하는 서울 한남동 고급 요정에 접대부로 나가게 된다.
이때부터 접대부 생활을 하게 되며 그 뒤 유명한 요정 선운각으로 옮기며 타고난 미모와 영어실력으로 선운각의 인기 있는 1급 접대부가 되었다.
이후 선운각에서 대한민국 정치계 인물인 모 씨모씨를 통해 공화당과 정부의 주요 인사들과도 만나게 됐다. 그때부터 그녀는 저명인사들의 노리개감으로 전락했다. 그 뒤 또다른 정부 고위 인사 모씨를 만났고 정인숙은 선운각을 그만두고 비밀요정으로 옮긴다.
그 뒤 그는 다른 요정에도 출입하는 등 여러 요정에 출입하며, 요정에서 그녀의 인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선운각, 옥류장 등 서울의 일류 요정들은 정인숙을 데려가기 위해 앞을 다투었다고 한다.
선운각등 최고급 요정에서 호스티스로 일하며 정인숙은 비밀요정을 주 무대로 정부의 A급 고관대작들만 상대했다고 한다. 평소 그는 주위에 “내 말 한마디면 안 되는 일 없다”며 자신이 정치권 고위인사와 ‘깊은 관계’라고 털어놓기도 했다.이같은 그의 명성 때문에 ‘정인숙 피살 사건’은 제3공화국 최대 ‘섹스 스캔들’로 비화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