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엽은 1980년대 한국유도의 간판스타로 계명대 2학년이던 1984년 화려하게 등장했다. 당시 LA올림픽 남자 60㎏급에서 은메달을 차지했고 1986 서울아시안게임과 1987 세계선수권대회, 1988 서울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휩쓸었다.
김재엽은 1964년 대구 출생으로 올해나이 57세이다. 복싱을 즐기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운동과 인연을 맺었다. 대구남산초 2학년이던 1972년 축구를 시작했지만, 예산 문제로 축구부가 해체하면서 1974년 유도로 방향을 틀었다. 대구중앙중 재학 시절까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이후 유도 기량이 뛰어난 친구의 ‘덤’으로 대구계성고에 입학했기에 방황하곤 했다. 유도를 그만둘 생각도 했다. 그러다 고교 2학년이 되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이러다간 죽도 밥도 다 안 된다는 절박함이랄까”라고 설명했다.그는 학교 선배들과 어울려 깡패 짓을 일삼았다며 고교 1학년 때까지 계속됐던 방황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던 어머니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아 청산했다고 말했다.
이후 남들보다 하루 평균 4∼5시간씩 더 훈련했고 덕분에 고교 2학년 때부터 3학년 때까지 국내대회에서 100연승 이상을 거뒀고 3학년 말엔 국가대표 선발전을 통과했다. 당시엔 고교생의 대표 선발전 참가가 허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100연승을 돌파한 그는 선발전에서도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이 후 유도에 전념했던 김재엽은 1984년 LA올림픽에서 예상치 못했던 일로 금메달을 놓치고 말았다. 절치부심 끝에 4년 뒤 서울올림픽에서 꿈에 그리던 금메달을 목에 건 김재엽은 그랜드 슬램까지 달성하며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화려한 선수생활을 끝내고 유도 지도자의 길을 걸었지만 1996년 5월 열린 애틀랜타올림픽 국가대표 최종 선발전에서 판정 시비로 유도계를 떠났다. 당시 그는 76㎏급에서 제자 윤동식이 조인철에게 판정패하자 항의했고, 한 달 후 대한유도회로부터 유도계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이유로 연금 중단 징계 처분을 받았다.
당시 학연에 따른 편파 판정으로 제자가 불이익을 받았고 재판까지 이어졌다. 그 역시 유도계의 주류 학교를 나오지 않았기에 더는 발을 붙일 수가 없었다. 김재엽은 1993년부터 대학 시간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임용은 매번 무산됐다. 유도계는 주류에 저항한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유도계의 압력 때문에 그는 팀, 학교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이후 김재엽은 사업가로 변신했지만 20억원이라는 큰 손해를 봤고, 설상가상 사기까지 당하게 됐다. 사업에 손을 댔고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가 터졌고, 사기까지 당했다. 그로 인한 충격과 방황은 이혼으로 이어졌고 김재엽은 노숙생활을 하며 점차 삶의 의욕을 잃어가다 극단적으로 자살까지 시도했다고 밝혔다.
죽음의 문턱까지 추락하던 김재엽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어린 시절 방황하던 그를 잡아줬던 그의 어머니였다.김재엽은 어머니가 너는 더 이상 금메달리스트 김재엽이 아니다’라고 다그치셨다며 어머니가 늘 곁을 지키며 물심양면으로 힘써주신 덕분에 제 2의 인생을 살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현재 동서울대학교 경호스포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김재엽은 처음으로 진심을 담아 어머니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해 모두를 뭉클하게 만들었다.